100여년 전, 캐나다연합교회 안에서 장로교 전통을 가진 선구자들이 뜨거운 선교적 열정과 냉철한 신학적 헌신을 토대로 캐나다 중부지역의 심장에 첫 신학교에 세웠습니다. 그 유산을 물려 받은 세인트앤드류스대학교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정의를 추구하는 기독교 교육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스카추완 입법부에서 1912년에 처음 발의돼 1913년에 통과된 법률안에 의해 사스카툰에 장로교신학대학교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습니다. 1914년 가을 학기에 알버트 거리 (Albert St.)에 위치한 큰 저택에서 37명의 학생들과 함께 첫 신학 교육의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1913년에 캐나다장로교회 총회는 사스카추완주립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던 에드문드 올리버(Edmund H. Oliver) 박사를 첫번째 대학 학장으로 선임했습니다.  

올리버 박사와 동료 교수들은 주립대학교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폭넓은 학문 훈련을 갖춘 신학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들의 헌신은 사스카추완주립대학교의 교내 안에 신학대학교 건물이 건립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주립대학교 입구에 있는 접근이 매우 용이한 토지를 기부 받았습니다. 1922년에 현재 서쪽 편에 있는 학교 건물이 착공됐습니다. 그곳에서 1923년 가을학기의 첫 수업이 열렸습니다. 같은 해에 리디아 그루체(Lydia Grunchy)라는 학생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1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캐나다연합교회에서 첫 여성 목회자로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스좌에 위치한 세인트앤드류스교회에서 그녀의 안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1925년, 캐나다 감리교와 장로교,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장로교신학대학교라는 학교 명칭에 대한 변경 논의가 대두됐고, 고심하던 중에 캐나다 선교를 위해 헌신한 장로교 성인인 앤드류 (스코틀랜드)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우리 학교의 이름을 세인트앤드류스대학교로 개명했습니다. 대규모 시장 붕괴를 초래한 대공황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암울했던 1930년대가 도래했지만, 우리 학교는 캐나다 중부 지역에 있는 다양한 공동체들과 교회들의 손을 잡고 함께 힘을 모아 신학생들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교육 과정을 지속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의 동편 건물을 세우기 위한 계획은 잠정 보류되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때마침 세계 2차 세계전쟁까지 발발하게 되면서 상당수의 학교 학생들이 유럽으로 건너가 캐나다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막을 내리고 10여년 동안 점차 경제가 번영하고 교회가 성장하게 되면서, 우리 학교를 찾는 발걸음들 역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이사회는 학교가 한층 더 발전해 나가 수 있도록 탄탄한 재정 구조를 만들기 위해 주변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을 수 있도로 하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이 제도를 통해 모이는 기금들은 더 나은 신학교육 환경을 위해 학습 자료 구매와 장학금으로 계속해서 쓰이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대학의 동편 건물에 대한 건축 논의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신학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캐나다 중부 지역에서 점점 더 높아지게 되면서, 폭넓은 교회 활동을 위한 우리 학교의 장래와 지속성이 주목받게 되었고, 그 결과 건물 증축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됐습니다. 1961년 9월, 서편 건물을 수리하는 것과 동시에 동편 건물의 증축 공사가 마무리 됐습니다.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캐나다는 가장 진보적이고 정치참여적 신학을 선도하는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근간에는 정의를 추구하는 정신과 사회적 행동을 위한 헌신을 강조하는 우리 학교의 역할이 컸습니다. 

1969년에 캐나다연합교회는 캐나다중부지역의 신학 교육 기관들의 역할을 재조정하였습니다. 위니펙주립대학교 신학전문가양성과정과 에드먼튼에 위치한 세인트스테븐스대학교가 대학원 교육과 심화연구를 맡게 됐습니다. 반면 우리 학교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이로써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교회의 허가 아래에서 졸업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정책은 우리 학교가 세워진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캐나다중부지역의 주요 신학교육 정책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 안에서 성별 균형이 이뤄지기 시작된 것은 대학원 과정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는 학생들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입니다. 오직 남학생만을 위해 마련됐던 기숙시설들은 1974년 이후부터 남녀학생들 모두에게 동등하게 배정됐습니다. 1970년대에 접어 들면서, 성공회 교단 신학교인 엠마뉴엘성차드대학교와 루터신학대학교와 함께 에큐메니컬한 협력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사스카툰신학교연합회가 결성됐습니다.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우리 대학의 지휘 체계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60년 동안 학장의 역할은 교수들과 적은 수의 학교 직원들을 책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부터 총장은 학교 운영과 발전, 대학 홍보와 학위 과정 계획, 그리고 캐나다 중부지역 3개 연회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신학과 페미니즘 이슈가 점점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를 하는 교수를 지원하기 위한 중부지역교회명예여성 기금이 설립됐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여학생들과 다른 직업을 그만두고 목회자가 되길 원하는 지원자들이 많아지면서 전체 신학생의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1980년대 중반, 우리 학교는 구내 식당의 문을 닫았고 학교 건물 동편의 꼭대기 층에 기숙 시설을 재배치하였습니다. 그 결과, 물리치료학과와 간호대학교의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대학 건물을 우리와 함께 사용하게 됐고, 우리 학교와 사스카추완주립대학교의 협력관계는 더 깊어졌습니다.

1994년과 1996년 사이에 우리 학교는 북미신학교협의회의 회원 학교로 승인 받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승인 필수 요건을 충족시키고 회원 지위를 유지시키 위해 우리 학교는 북미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신학대학들과 같이 우수한 신학 교육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기 전10여 년 동안은 안정과 신뢰를 되찾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모든 신학 분야를 완벽하게 교육할 수 있도록 교수진이 확충됐습니다. 대학 건물에 새로운 보일러의 설비를 마쳤고, 오랜 염원이었던 엘리베이터 운행을 동편과 서편 건물 모두에서 가능하도록 설치 공사를 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의 환대 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연구와 준비를 마친2009년부터 우리 학교는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에 상관 없이 모든 이들이 따뜻하게 맞이하는 공동체 (affirming ministry)로 탈바꿈하였습니다.

목회자 양성을 위한 목회학석사과정에 18~20개월 간의 목회 실습과 그 기간 동안 학문과 실천 성찰이 중점이 되는 5차례의 수업 (Learning Circles)이 추가되면서 학문과 실천이 더욱 깊이 있게 통합되는 기회가 마련됐습니다.

그 뿐 아니라, 농어촌 목회와 지역사회 공동체 개발과 발전에 관한 목회학박사과정을 처음으로 공식 승인받았습니다. 2011년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한신신학대학원과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새로운 국제 연대 관계의 문을 열었으며, 한국-캐나다 기독교인들과 캐나다연합교회의 성도들이 더 깊게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했습니다.